USB를 이용한 전원 공급 (2) - USB PD
USB 포트는 원래 데이터 전송을 위한 인터페이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력 공급 수단으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USB BC가 도입되었고, 기존보다 높은 전류를 제공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하지만 USB BC 1.2는 전압 고정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어, 노트북 같은 고출력 기기를 충전하기에는 부족했다. 이런 제약 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조사마다 별도의 급속 충전 방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특정 브랜드의 디바이스는 해당 브랜드의 충전기에서만 고속 충전이 가능한 호환성 문제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USB-IF는 USB Power Delivery(a.k.a. USB PD)라는 전력 공급을 위한 새로운 표준을 만들었다. USB PD는 전압과 전류를 동적으로 협상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뿐만 아니라 , , 등 다양한 전압을 지원하고 최대 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스마트폰부터 노트북, 모니터, 이론상으로는 일부 데스크톱 기기까지 USB-C 하나로 전원 공급이 가능해졌으며, 장치 간의 호환성과 범용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USB PD와 CC 라인
USB PD가 USB BC보다 더 많은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Type-C 컨넥터, 특히 CC 핀의 존재 덕분이다. USB Type-C 커넥터는 좌우 대칭 구조를 채택하여 어느 방향으로 꽂아도 동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이 방향 감지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Configuration Channel(a.k.a. CC) 핀이다. 기본적으로 CC 핀은 케이블의 방향을 감지하고, 연결된 장치가 전력 공급자인지 소비자인지 식별하는 데 사용된다. USB PD에서는 이 CC 핀을 이용해 전력 협상을 위한 디지털 통신을 수행한다. 소스 디바이스(전력을 공급하는 기기)는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전력 프로파일을 CC 핀을 통해 싱크 디바이스(전력을 소비하는 기기)에게 알리고, 싱크 디바이스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전력을 선택해 소스에 요청한다. CC 핀은 이처럼 단순한 방향 감지를 넘어서, 전력 협상의 통로로 기능하며 USB PD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CC핀은 Type-C 컨넥터에만 존재하고 Type-A나 Type-B 컨넥터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USB PD는 충전기와 기기 모두가 USB Type-C 포트를 사용할 때에만 정상적으로 동작할 수 있다. 일부 제조사는 Type-A to Type-C 형태의 케이블이나 충전기에서도 고속 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는 USB PD가 아닌 퀄컴의 퀵차지나 삼성의 AFC 같은 독자 규격을 사용하거나, 단순히 USB PD 신호를 일부 에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디바이스에 호환되지 않는 과도한 전원을 공급하여 기기를 망가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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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신호는 지원하지 않지만, USB PD(60W)는 지원하는 USB 케이블 |
USB CC 라인은 다른 데이터 라인과 다르게 차동 신호쌍을 쓰지 않고 단일 신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데이터 라인에비해 잡음에 대한 내성이 약하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USB PD 표준은 CC 라인을 사용할 때 통신 신호의 정합성을 보장하기 위해 Biphase Mark Code(a.k.a BMC) 방식을 채택했다. BMC는 신호 전압이 일정 간격마다 반드시 변하도록 규정하는 인코딩 방식으로, 데이터의 유효성을 시계열 변화 자체로 검증할 수 있게 하여 긴 정적 상태로 인한 신호 해석 오류를 방지한다. 또한 CC 라인에서는 데이터 라인의 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속도인 약 로 통신을 수행함으로써 고주파 간섭의 영향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모든 메시지에 Cyclic Redundancy Check(a.k.a CRC)를 포함하고, 수신자는 메시지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GoodCRC
메시지를 응답하도록 하여 단일 신호 기반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통신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USB PD의 전력 협상
USB PD의 전력 협상은 우선 전원을 공급할 방향을 결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는 USB 3.x에 정의돼 있는 과정으로 전원을 공급할 능력이 없는 기기는 CC 핀을 GND와 Rd
(약 )의 pull-down 저항으로 연결한다. 반면 전원을 공급할 능력이 있는 기기는 CC 핀을 VBUS와의 pul-up 저항을 연결한다. 각 기기는 CC 핀에서의 전압 변화를 감지하여 자신이 전원을 공급하는 소스 디바이스라고 판단되면 VBUS에 의 전압을 공급하는 것으로 협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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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가 의 전압을 가하는 상태를 Default Contract라고 부른다. 소스 디바이스는 자신이 전원 공급을 담당하게 되면 일정 시간을 주기로 Source_Capabilities
메시지를 보낸다. 기본적으로 소스 디바이스는 싱크 디바이스가 메시지를 보내올 때까지 Source_Capabilities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내지만, 무한히 보낼 필요는 없다. 만약 효율성을 중시한다면 일정 횟수만 반복한 뒤 싱크 디바이스의 응답이 없으면 Default Contract를 유지할 수 있다.
Source_Capabilites
메시지에는 소스 디바이스가 제공 가능한 전압과 전류의 조합을 담고 있다. Source_Capabilities
메시지의 핵심은 Power Data Objects
(a.k.a. PDO)다. 하나의 Source_Capabilities
메시지는 최대 7개의 PDO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PDO에 공급되는 전력이 고정 전압인지, 변동 전압이거나 배터리인지, 허용하는 전압은 얼마이고 전류는 얼마인지가 적혀있다.
싱크 디바이스는 Source_Capabilites
메시지를 받으면 그 중 자신이 받기 원하는 전압과 전류의 조합을 선택하여 소스 디바이스에게 응답한다. 이 메시지를 Request
메시지라고 한다. Request
메시지에서는 원하는 전압과 전류의 조합을 Source_Capabilites
메시지에 들어있는 PDO의 순서로 응답한다. 따라서 Source_Capabilites
메시지에서 제공하지 않는 조합의 전력은 요청할 수 없다.
소스 디바이스는 Request
메시지의 응답을 받았고, 이 요청에 문제가 없으면 Accept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Accept
메시지를 받았다고, 싱크 디바이스가 바로 요청한 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직 소스 디바이스가 준비되지 않았을 수 있다. 소스 디바이스는 싱크 디바이스가 요청한 전압과 전류의 공급을 시작하고 PS_RDY
메시지를 보낸다. 싱크 디바이스는 PS_RDY
메시지를 받은 이후에야 자신이 원했던 전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싱크 디바이스의 요청에 대한 응답(Accept
메시지)과 실제 변경된 전압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PS_RDY
메시지)이 구분되어 있는 이유는 전력 시스템의 안전성 때문이다. Accept
메시지는 소스 디바이스가 싱크 디바이스의 전력 요청에 동의했음을 알리는 논리적인 확인 신호이다. 하지만 실제로 전압과 전류를 변경하고 안정화하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전환 과정 동안 전력 공급은 불안정할 수 있다. 만약 소스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싱크가 그 전력을 사용할 것이라 가정하고 회로를 연결해버린다면, 전압 불안정이나 과전류에 의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PS_RDY
메시지는 이러한 전환 과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고, 이제 요청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준비가 되었다는 물리적인 상태를 알리는 신호다. 따라서 이 두 메시지를 분리함으로써, 싱크 디바이스는 소스가 동의는 했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전력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방지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소스 역시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부하가 걸리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전력 협상이 완료 된 상태를 Explicit Contract라고 부른다. 이 상태에서는 최소 (, ), 최대 (, )의 전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범위를 Standard Power Range(a.k.a. SPR)이라고 부른다. USB PD가 만들어졌던 초기에는 최대 의 전원이 필요한 기기도 얼마 없었기에 이로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USB PD로 전원을 공급받는 노트북이나 고성능 모니터가 등장하며 더 많은 전원을 공급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Extended Power Range
결국 2021년 출시 된 USB PD 3.1 표준에서는 최대 (, )를 지원하는 새로운 프로토콜을 USB PD에 추가했다. 를 이 범위를 Extended Power Range(a.k.a. EPR)이라고 부른다. EPR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양 디바이스가 EPR 모드에서 정의하는 메시지를 지원해야 할 뿐 아니라 사용하는 케이블도 EPR을 지원해야 한다. EPR을 지원하는 디바이스는 케이블의 컨넥터에 들어있는 E-Marker와 통신하여 케이블이 EPR 모드를 지원하는지 확인한다. 이는 케이블도 고전압에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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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R Mode |
케이블이 EPR을 지원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 뒤로는 SPR 모드의 Source_Capabilities
메시지와 Request
메시지에 대응하는 EPR_Source_Capabilities
메시지와 EPR_Request
메시지, 그리고 SPR 모드에서도 사용됐던 Accept
메시지와 PS_RDY
메시지를 통해 사용할 전력을 재협상한다. EPR 전원 협상이 완료되면 싱크 디바이스는 주기적으로 EPR_KeepAlive
메시지를 보내 EPR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주기적인 EPR_KeepAlive
메시지가 없으면 소스 디바이스는 SPR 모드로 돌아간다.
이 모든 과정은 SPR 모드의 Explicit Contract가 맺어진 뒤 진행된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함의한다. 첫째, 모든 EPR 지원 장치는 반드시 SPR 모드 또한 완벽하게 지원해야 한다. EPR 모드로 진입하기 위한 협상 자체가 SPR 계약이 성공적으로 수립된 이후에 진행되므로, 기본적인 SPR 전압 협상 및 전력 공급/수신 능력이 없다면 EPR 기능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상대 장치나 사용된 케이블이 EPR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 장치는 안전하게 SPR 모드로 동작해야 하므로 SPR 지원은 필수적인 기반이자 안전망 역할을 한다. 둘째, EPR의 고전압 전력 공급은 초기 연결 시의 Default Contract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드시 SPR 모드를 거쳐 단계적으로 상승한다. 즉, 시스템은 먼저 에서 시작하여 SPR 전압으로 안정적인 명시적 계약을 맺고, 그 이후에야 별도의 EPR 진입 절차를 통해 고전압으로 전환을 시도한다. 이러한 계단식 전압 상승 방식을 통해 갑작스러운 큰 폭의 전압 변화로 인한 전기적 스트레스와 잠재적 위험을 줄이고, 각 단계에서 시스템과 케이블의 상태를 확인하며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USB PD의 도입 현황과 미래
USB PD 3.1이 이론적으로는 최대 의 전력을 지원하지만, 실제로 이 전력을 활용하는 기기는 아직 많지 않다. 고출력 어댑터나 고사양 케이블의 비용, 물리적 크기, 발열 문제 등이 모두 상용화를 늦추는 요인이다. 특히, 전압을 안정적으로 처리하려면 더 정교한 회로 보호 설계가 요구된다. 정교한 회로는 높은 비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높은 전압이 필요한 경우 기존에 사용하던 AC 전원 어댑터(2P, 3P 등)을 사용하거나, 전용 DC 어댑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USB PD는 대부분의 경우 이하의 SPR 모드로 동작하고 있으며, EPR은 고성능 노트북 등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SB PD는 단일 규격으로 수많은 기기를 충전하고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USB Type-C 포트 하나로 스마트폰, 노트북, 모니터, 심지어 일부 데스크톱 부품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사용자는 복잡한 전원 어댑터를 구분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고속 충전 기술들이 난립하던 시대와 비교하면, USB PD는 업계 전반에 통합성과 호환성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발전이다. 앞으로도 USB PD는 더 높은 전력, 더 안전한 협상 방식, 그리고 다양한 기능 통합을 목표로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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